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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스이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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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센스이 히로시는 1960년 살인 강도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77년 다카 일본항공기 납치 사건 당시 일본 정부에 의해 초법규적으로 석방되어 일본 적군에 합류했다. 이후 필리핀에서 위조 여권 제공 등 일본 적군 활동을 지원하다가 체포되었고, 1995년 형이 확정되었다. 2020년 복역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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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스이 히로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센스이 히로시
원어명泉水博 (いずみ ひろし)
출생일1938년
출생지지바현 기사라즈시
사망일알려지지 않음
국적일본
직업살인자

2. 생애

지바현립 키사라즈 제2고등학교(현재의 지바현립 키사라즈히가시 고등학교)를 2년 만에 중퇴한 후,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일본 적군 합류 후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인이었다고 한다. 기타지마 사부로의 노래를 애창곡으로 삼고 있었으며, 기타지마가 1985년에 시리아와 일본의 문화 교류 사업으로 동국의 보스라에서 콘서트를 열었을 때, 관람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센스이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기타지마는 동지인가?"라고 일본 적군에 문의했다는 일화가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일본 적군의 방침에 따라 거점을 필리핀에 두고, "야마구치 노보루"라는 이름으로 무역상으로 현지에 녹아들면서, 마루오카 오사무에게 위조 여권을 제공하는 등 일본 적군에 대한 병참 활동을 담당했다.

2. 1. 범죄와 수감 생활

1960년, 동료 2명과 함께 회사 중역의 아내를 찔러 살해하고 1.5만을 강탈한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센스이는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지바 형무소에서 복역했다.[4]

모범수로 가석방을 앞두고 있었지만, 같은 형무소의 수감자가 으로 토혈하며 괴로워하자, 간수를 인질로 잡아, 의사에게 보이도록 요구했다. 이 사건으로 아사히카와 형무소로 이송되었지만, 그곳에서도 모범수로 관리 측과 수감자 측 모두의 신뢰를 얻었다.[3] 이 행동은 같은 형무소에 있던 노무라 슈스케[2] 등에 의해 미니 코믹지나 입소문을 통해 "지바 형무소에 센스이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 이후 통일 옥중자 조합 결성으로 이어졌다.

1977년 9월 28일 발생한 다카 사건에서는, 강도 살인 범죄자로 사상적 배경이나 일본 적군과는 관계가 없었지만, 옥중자 조합 결성이 반체제 행동으로 납치범 측에 의해 평가받아, 마찬가지로 살인으로 복역 중이던 니히라 에이와 함께 석방 요구 목록에 지명되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센스이와 니히라를 "사상범이 아닌 형사범"이라는 이유로 두 사람의 석방 거부 방침을 가지고 있었지만, 납치범에게 거부당하여 석방 대상이 되었다. 그 후, 일본 정부에 의해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되어 일본 적군에 참가했다. 센스이는 "기뻐서 출옥한 것은 아니다. 당국에 '스스로 판단하라'고 내몰렸고, '혼자라도 (인질에게) 희생이 생기면 후회하는 것은 나다'라고 생각한 결과였다"[4]라고 말했다. 그 후, 국제 수배되었다.

1988년 6월 8일, 필리핀에서 여권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1995년 3월, 1977년 석방 전의 무기징역에 여권법 위반 징역 2년이 더해졌다.

2020년 3월 22일 밤, 복역 중이던 기후 형무소 내에서 심폐 정지 상태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27일에 사망했다[1]

2. 2. 다카 사건과 일본 적군 합류

지바현립 키사라즈 제2고등학교(현재의 지바현립 키사라즈히가시 고등학교)를 2년 만에 중퇴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960년 동료 2명과 함께 회사 중역의 아내를 찔러 살해하고 15000JPY을 강탈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지바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모범수로 가석방을 앞두고 있었지만, 같은 형무소 수감자가 으로 토혈하며 괴로워하자 간수를 인질로 잡아 의사에게 보이도록 요구했다. 이 사건으로 아사히카와 형무소로 이송되었지만, 그곳에서도 모범수로 관리 측과 수감자 측 모두의 신뢰를 얻었다[3]

1977년 9월 28일 발생한 다카 사건에서 강도 살인 범죄자로 사상적 배경이나 일본 적군과는 관계가 없었지만, 옥중자 조합 결성이 반체제 행동으로 납치범 측에 의해 평가받아 석방 요구 목록에 지명되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센스이를 "사상범이 아닌 형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 거부 방침을 가지고 있었지만, 납치범에게 거부당하여 석방 대상이 되었다. 그 후, 일본 정부에 의해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되어 일본 적군에 참가했다. 센스이는 "기뻐서 출옥한 것은 아니다. 당국에 '스스로 판단하라'고 내몰렸고, '혼자라도 (인질에게) 희생이 생기면 후회하는 것은 나다'라고 생각한 결과였다"[4]고 말했다. 그 후, 국제 수배되었다.

2. 3. 일본 적군 활동과 체포

지바현립 키사라즈 제2고등학교(현재의 지바현립 키사라즈히가시 고등학교)를 2년 만에 중퇴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960년 동료 2명과 함께 회사 중역의 아내를 찔러 살해하고 15000JPY을 강탈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이 확정, 지바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모범수로 가석방을 앞두고 있었지만, 같은 형무소 수감자가 으로 토혈하며 괴로워하자 간수를 인질로 잡아 의사에게 보이도록 요구했다. 이 사건으로 아사히카와 형무소로 이송되었지만, 그곳에서도 모범수로 관리 측과 수감자 측 모두의 신뢰를 얻었다.[3]

1977년 9월 28일 발생한 다카 사건에서 강도 살인 범죄자로 사상적 배경이나 일본 적군과는 관계가 없었지만, 옥중자 조합 결성이 반체제 행동으로 납치범 측에 의해 평가받아 석방 요구 목록에 지명되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센스이를 "사상범이 아닌 형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 거부 방침을 가졌지만, 납치범에게 거부당하여 석방 대상이 되었다. 이후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되어 일본 적군에 참가했다. 센스이는 "기뻐서 출옥한 것은 아니다. 당국에 '스스로 판단하라'고 내몰렸고, '혼자라도 (인질에게) 희생이 생기면 후회하는 것은 나다'라고 생각한 결과였다"라고 밝혔다.[4] 그 후, 국제 수배되었다.

일본 적군 합류 후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인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일본 적군의 방침에 따라 거점을 필리핀에 두고, "야마구치 노보루"라는 이름으로 무역상으로 현지에 녹아들면서, 마루오카 오사무에게 위조 여권을 제공하는 등 일본 적군에 대한 병참 활동을 담당했지만, 1988년 6월 8일, 필리핀에서 여권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1995년 3월, 1977년 석방 전의 무기징역에 여권법 위반 징역 2년이 더해졌다.

2. 4. 재수감과 사망

1977년 9월 28일에 일어난 다카 사건에서, 센스이는 강도 살인 범죄자였지만 일본 적군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옥중자 조합 결성이 반체제 행동으로 평가받아, 납치범 측은 마찬가지로 살인으로 복역 중이던 니히라 에이와 함께 센스이를 석방 요구 목록에 지명했다.[4]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센스이와 니히라를 "사상범이 아닌 형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을 거부하려 했지만, 납치범이 이를 거부하여 결국 석방 대상이 되었다. 이후 일본 정부는 초법규적 조치로 센스이를 석방하고 일본 적군에 참가시켰다. 센스이는 "기뻐서 출옥한 것은 아니다. 당국에 '스스로 판단하라'고 내몰렸고, '혼자라도 (인질에게) 희생이 생기면 후회하는 것은 나다'라고 생각한 결과였다"라고 밝혔다.[4] 그 후, 센스이는 국제 수배되었다.

1988년 6월 8일, 센스이는 필리핀에서 여권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1] 1995년 3월, 1977년 석방 전의 무기징역에 여권법 위반 징역 2년이 더해졌다.

2020년 3월 22일 밤, 센스이는 복역 중이던 기후 형무소 내에서 심폐 정지 상태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27일에 사망했다.[1]

3. 양형 논란

형법에 의해 무기징역의 시효가 20년이었기 때문에, 20년간 도망하면 무기징역이 면제될 우려가 있었다. (형의 시효는 공소시효와 달리, 국외 도망의 시효 정지 규정이 없다.) 그러나 석방 후 약 10년 8개월 뒤인 1988년 6월 7일 필리핀에서 여권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일본으로 송환되어 구류가 되면서 형의 시효는 불성립되었다. 1995년 3월, 도망 전의 무기징역에 여권법 위반의 징역 2년이 가산되었다.

4. 비판 및 논란

센스이 히로시는 형 집행 과정에서 공정성 논란이 있었다.

4. 1. 형 집행의 공정성

일본 형법에 따르면 무기징역의 시효는 20년이므로, 20년간 도망하면 무기징역이 면제될 수 있었다. (형의 시효는 공소시효와 달리 국외 도망 시 시효 정지에 대한 규정이 없다.) 그러나 센스이 히로시는 석방 후 약 10년 8개월 뒤인 1988년 6월 7일 필리핀에서 여권법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일본으로 송환되어 구류되면서 형의 시효는 불성립되었다. 1995년 3월, 센스이 히로시는 도망 전의 무기징역에 여권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이 추가되었다.

참조

[1] 뉴스 泉水博受刑者が死去 元赤軍メンバー https://www.nikkei.c[...] 2020-03-31
[2] 간행물 【追悼・泉水博】君に泉水博の慟哭は聞こえるか=かけらほども左翼でない彼がなぜ日本赤軍へ= 21世紀書院(野村秋介事務所)
[3] 간행물 帰国者の裁判を考える会 会報『ザ・パスポート』12号、1990年7月25日、旭川刑務所管理部長(1977年当時)の証言 帰国者の裁判を考える会 1990-07-25
[4] 뉴스 こちら特報部 東京新聞 20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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